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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수학과생 중 자폐인이 많아보이는 이유는?

by JessieKhan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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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수학과생(이나 여러 이공계열 전공자)들 중에는 자폐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들 한다. 실리콘밸리 엔지니어 중에 자폐인이 많다거나, 옥스브리지나 아이비리그급 명문대 수학과생 중 자폐인이 많다거나... 다들 나 같은 비전문가에겐 구체적 수치까진 확인 못하지만 그럴싸하게 들리는 주장이다.

 

나는 이번 글에서 이를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다. 오히려 상당히 동의하는 편이다. 다만, 그 인과관계에 있어서는 외부인(?)들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고 본다.

 

내가 경험에 근거하여 뇌피셜로 추측컨대, 자폐인들이 꼭 '수학을 좋아해서 수학과에 많이 가'기 때문에 수학과생 중 자폐인이 많은건 아니다. 수학과에서 가르치는 전공수학 분야에서는 자폐스펙트럼장애인들이나 할 법한 사고방식인 고집스럽고 흑백논리스럽고 융통성 없고 쪼잔하고 비타협적인 연역논증을 반복적으로 훈련하기 때문에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非자폐인도 자폐인과 비슷한 방식으로 머리를 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증명되지 않은 주장은 절대로 신뢰하지 않고 검증부터 해야 하며, 증명 하나를 스스로 해내기 위해서는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읽고 이해해나가며 이들 재료를 잘 활용하여 논리적 비약을 없애야 한다. 이런 짓을 현실 사회에서 다른 이들과의 상호 교류에서 완전무결히 해내기엔 한계가 있다만, 자폐인들이 생각하는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적정선과 非자폐인들이 생각하는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적정선의 높이는 너무나 다르다. 결국 수학과에서 사고방식을 자폐스럽게(?) 개조당한 이들이 대학을 떠나 사회에 노출되면 그런 수학적 사고방식에서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데, 非자폐인들은 이런 것을 두고 수학과생들이 논리적이라느니, 수학과생들은 사회성 떨어진다느니 하는 뒷담화를 일삼곤 한다. 하지만 자폐스러운 사고방식을 체화한 수학자들은 그 사고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데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상식이 모순적이면 상식을 버리고, 현실이 모순적이면 현실을 버리는 비타협적 연역논증은 수학의 학습과 연구에 있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수학이라는 진입장벽이 장벽 너머 누군가에겐 사회로의 탈출을 막는 탈출장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DSM-V의 진단기준에 따르면 다음 A, B, C, D를 모두 만족해야 한다고 한다.

A.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나타나는 사회적 의사소통 및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속적인 결함이 현재 또는 과거력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A1. 사회적-감정적 상호작용의 결함

A2.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비언어적 의사소통 행동의 결함

A3. 관계 발전, 유지 및 관계에 대한 이해의 결함

B.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이나 흥미, 활동이 현재 또는 과거력상 다음 항목들 가운데 적어도 두 가지 이상 나타난다;

B1. 상동증적이거나 반복적인 운동성 동작, 물건 사용 또는 말하기

B2. 동일성에 대한 고집, 일상적인 것에 대한 융통성 없는 집착

B3. 강도나 초점에 있어 비정상적이리만치 극도로 제한되고 고정된 흥미

B4. 감각 정보에 대한 과잉 또는 과소 반응. 환경의 감각영역에 대한 특이한 관심

C. (대략) 초기 발달 시기부터 이랬다

D. (대략) 지금의 기능영역에서 뚜렷한 손상

 

여기서 B를 자세히 곱씹어보자. 전공수학은 답답하리만치 제한적&반복적으로 정의·정리·증명을 반복하는 학문이다. 영어로 쓰인 수학 교과서의 본문을 보면 내용의 압도적인 위압감과는 별개로 본문의 문장 하나하나는 매우 천편일률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어를 모어로 하지 않는 학자들의 영어 구사 패턴을 보면 알 수 있다. (학자까지 갈 것도 없이 사실 나도 그렇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욱이 B1~B3의 주제는 더욱 그러하다. 공리적집합론과 해석학과 선형대수와 현대대수와 위상수학과 복소해석과 실해석과 미분기하 등의 핵심 과목들은 상당부분이 반복적인 사고 훈련으로 점철되어 있다. 수학과 학부 수준 커리큘럼은 사실상 위대한 수학자들의 사고방식을 따라하고 이 사고방식을 체화하는 훈련의 반복이다, 이런 반복적인 사고훈련으로 점철된 전공수학을 진득히 공부하다보면 클리셰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그리고 뭐라고? 동일성? 이거이거 수학에서는 Isomorphism이라고 부르는 그런거 아닌가? 강도와 초점에 있어 극도로 제한되고 고정된 흥미? 파도파도 재밌는게 이 바닥이라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수학 및 수학과생들에 대한 스테레오티피컬한 편견을 주장하려는 사람에겐 정 주장하고 싶으면 이렇게 주장하라 권하고 싶다. 자폐인이 수학과에 꼭 많이 가는건 아니다. 자폐인 중에도 수학 싫어하는 사람 은근히 많다. 단지, 수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연구한 수학자 및 수학도 중 자폐인이 많은 것이다. 수학과생 중 자폐인이 많아보이는건, 프로 수학자를 조련하는 과정에서 각 학습자들에게 자폐인들이나 할 법한 답답한 사고방식을 체화하게 만드는 전공수학의 사고방식 재정립 과정이 유발하는 착시효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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