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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위험

by JessieKhan 2023.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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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참 위험하다.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겪을 온갖 증오범죄 폭력이라는 위험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겪을 온갖 재정적 불확실성에 기인한 위험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겪을 온갖 건강에의 위험

 

위험은 나는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확률(Probability)이라는 말은 수학자들이 와지끈뚝딱 도박꾼 타짜놀음을 하다가 수학용어로서 잘 정의하기 이전까지 매우 주관적이고 중구난방적인 의미로 두서없이 사용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험이라는 관념을 대하는 기술적, 경제적 접근과 심리학적, 사회학적 접근은 모두 다양하지만 상호배타적이지 않고 골고루 적절히 고려된다

 

위험은 집단에 의해 선택된다고 분석하는 위험의 문화이론에서, 그리드-그룹이라는 틀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집단이나 사회가 문화에 따라 위험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드는 쉽게 말해 사회나 조직에서 구성원의 조직 내 역할이 빡센 제약을 통해 규정되면 강하고, 그 제약이 느슨하고 자유로우면 약한 것이고, 그룹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이 강하면 강한 그룹, 약하면 약한 그룹이다. 이를 나누면 강&강, 약&약, 약&강, 강&약으로 구성된다.

  • 강&강은 위계주의적 집단이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상급자의 권위가 매우 중시되는 국가, 관료제, 가부장제 등의 집단으로, 집단과 사회 질서의 유지의 측면에서 위험이 분석되는데, 이는 컨트롤프릭(?) 같은 면이 있어서 위험은 반드시 적극적으로 통제되고 관리된다는 전제 하에서나 수용되고 조정되며 그러하지 않은 위험은 거부된다. (위험 적응 adapting to risk)
  • 약&약은 개인주의적 집단이다. 위계주의와는 극단적으로 다르며, 조직에 속하기 위한 의무도 강하지 않고 조직에의 소속감도 낮다. 모든 행동과 결과는 개개인의 자유의지와 책임 하에 이뤄지는 각자도생급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정글자본주의를 기치삼는 자유시장경제의 사업가와 투자자 같은 구성원들로 이뤄져 있으며, 위험은 적극적으로 인지되고 수용된다.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숭상하며, 위험은 더 높은 곳을 향한 레버리지로도 여겨진다. (위험 수용 embracing risk)
  • 약&강은 뭐랄까, 트위터 운동권(?) 같은 평등주의적 집단이다. 결과의 평등이 중요하며, 시민사회단체, LGBT, 노동조합, 환경운동권, 민주화운동권 등이 이런 타입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집단 내 불평등이 심해지게끔 하는 요인이므로 위험요인은 되도록이면 회피하고 없애고 싶어한다. (위험 거부 rejecting risk)
  • 강&약은... 너무 슬픈 숙명주의적 집단이다. 마약중독자, 알코올중독자 등의 우울한 집단은 사회의 위계에 굴복해있으며 인생관이 주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기만 하다. 위험이 있거나 말거나 회피든 분석이든 준비든 어금니꽉 깨물지조차 않은채 무방비로 수용된다. 위험이 위험으로 인식되지조차 않은채 그냥 무시당하는 것이다. (위험 무시 ignoring risk)

경제적 인간상(homo economicus)은 합리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며, 위험을 회피하거나 매사에 신중한 인간이다. 반면 유희적 인간상(homo ludens)은 기쁨, 재미, 즐거움을 위해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어쩌면,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만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경제학적 상식은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만큼까지 충분히 일반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 위험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서 위험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고 많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윤이든, 유희든 어느 한 쪽만 일관적으로 추구할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스트리아학파가 쌉마이너한 이유 또한 이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이상의 내용은 이 책의 제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책 아주 좋아요 꼭 읽어보세요 <위험한 위험: 위험학으로의 초대>, 석승훈 지음)

 

나는 과연 내 삶의 위험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고 있는걸까.

내가 컴아웃하자 언니가 가장 먼저 걱정스레 쏘아붙인 잔소리가 있다.

 

"야이 拾탱아 그 흔하디 흔한 암보험조차 제대로 못 들어놨는데 왜 덜컥 아무 상의도 없이 주사를 맞어!"

 

...이야 역시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사고는 남다르다. 언니는 지금도 주사를 3년만이라도 끊으면 안되겠니 하는 무서운(...) 부탁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역시나 갱년기 증상과 신체의 역변화 위험과 병무청의 태클(...)이 무서워서 감히 언니의 부탁을 따르지 못하고 있고 언니 역시 이 위험에 대해 냉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서 내게 더 큰 잔소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전부터는 언니가 중병(이긴 하지만 일단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이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귀찮은 난치병)을 선고받아 나한테 하는 잔소리랑 똑같은 투로 "보험 들긴 글렀다ㅠㅠ"를 반복하고 있다. 중년 아줌마들이 보험 들다 집안 말아먹는다던데 언니가 딱 그꼴이여 ㅋㅋㅋㅋㅋ 이런 집안을 유튜브에서 진취적으로 투자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영위하라고 이러쿵저러쿵 쓴소리 하는 부읽남 김작가 너나위 등 여러 저명한 재테크 유튜버들이 보면 "아 이건 좀... 보험 좀 엥간히 하시죠ㅠㅠ" 할 것도 같은데, 나는 가족들이 보험 없거나 보험금 지급 거부당해서 평생 핵고생하는걸 30년 가까이 봐왔기 때문에 그 보험중독(?)스러운 언니의 억척스러움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30대가 되고 언니가 저모냥저꼴(?)이 된걸 보며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슬슬 진지하게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호르몬 주사를 계속 맞을 수 있을까? 에스트라디올 데포를 계속 맞을수록 호르몬은 분명 내가 감히 짐작조차 못하는 어떤 방식으로 내 건강과 내 미래를 좀먹고 있는데, 젠더 디스포리아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고자 언제까지 육체건강을 희생할 수 있을까? 망가진 몸으로 삶의 굴레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목표를 이루기 전에 몸이 고장나면 어째야 할까? 언니 몸이 먼저 고장나버리면 어째야 할까? 아빠 몸이 더 고장나버리면 어째야 할까? 만약 언니네에서 사고가 터져서 곤란해지면 어째야 할까? 난 이런 위험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이런 리스크를 내가 굳이 사람을 새로 창조해서까지 타인에게 전가하고 싶지도 않다. 굳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별의 리스크까지 감당해낼 자신도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위험을 감당해내야만 삶을 지속가능히 유지할 수 있음을 우울하리만치 잘 알고 있다. 오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내일은 더 오랜 시간을 뛰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살기 괴롭다 해도 자살을 시도했다가 죽지 못했는데 다시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 상태가 될 위험이 작지 않기 때문에 계속 힘들고 계속 괴로워진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책없이 자살하려 들면 안된다는걸 잘 알고 있다.

 

난... 미래가... 무섭다...

역시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락한 삶인 것이다... 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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