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내게 운명론적/패배주의적 세뇌를 거듭한다. 학교 다닐 때 어떤 과학영재 프로그램을 다니던 (그러나 선생님들한테는 나보다 딱히 특출나게 돋보이지도 않았던) 애가 조기졸업과 월반을 거듭하여 지금은 훨씬 잘 살고 있는걸 접하자 "연대 교수 부모 뒀으니 저렇게 키울 수 있던거"라고만 한다.
오늘, 나는 내 세대의 부모와 같은 세대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늦둥이 대학원생이 제 아버지의 석사 논문을 까발리는 트윗을 봤다. 내 부모는 둘 다 초졸에 불과하다. 언니도 엄마와 아빠의 시간차 암투병을 돌보느라 대학을 못 마쳤다. 다양한 종류의 암과 퇴행성질환과 자가면역질환 등 질병 가족력도 다채롭다. 추가로 나는 자폐인이기도 하고 트랜스젠더이기도 하다. 참⋯ 다양한 이유로 만만찮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고작 팔자가 더럽고 유전자가 글러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포기하고 죽은 후 내가 기억당하기 싫은 방식으로 기억당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언니는 이런 의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맹렬히 Yes라 단언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한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학력 컴플렉스를 갖고, 살라고 한다.
아오 씨발 이게 말이여 방구여 뚫린 입으로 이딴 씹소리나 씨부리다니⋯
그러나 다시금 되새긴다. 학자가 자신이 뚫어낸 역경과 극복해낸 상처에 근거하여 평가받지는 않는다. 학자는 논문으로 평가받는다. 아무리 내가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들 제대로 된 논문을 쓰지 못하면 내 운명에의 저항은 학술적으로 무의미하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가 현대수학을 재창조한 위대한 논문과 저술 덕에 대가로 인정받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생 덕에 대가로 인정받던가? 역경을 극복한 大학자는 역경을 극복하고 남긴 위대한 업적 덕에 존경받지 역경을 극복해온 인생서사만으로 존경받진 않는다. 차별을 견뎌내고 학위를 따봤자 논문이 죄다 개판이면 차별을 딛고 일어선 학자의 투쟁은 투쟁을 위한 투쟁일 뿐 학술적으론 무의미하다.
대체 언제까지 nobody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죽은 후 somebody로 기억당하고 싶다. 가족과 지인에게만 기억당할 사람으로 죽기는 싫다. 다른 어떤 수학도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를 뭔가를 하나라도 남기고 죽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살하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죽으면,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당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당할 수 없다면 차라리 누구에게도 기억당하지 않을 죽음을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잖은가. 오늘도, 나는, 실패한 삶을 때려치우고픈 자살욕을, 그렇게 애써 억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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